Homo Mobilicus






'權慧祚 展'


Gallery MANO

9.  1 -  9. 30




 캔버스 표면에 납작하게 밀착된 물감의 층이 올라와 있다. 

나이프로 밀고 나간 자취가 응고된 흔적이다.

몇 가지 단색으로 칠해지고 약간의 두께를 지닌 채 일정한 높이, 최소한의 질감을 만들고 있는 화면은

캔버스의 평면성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이미지를 파생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기능한다.

캔버스 위에 또 다른 화면, 흡사 벽화나 에칭이 가능한 면/판을 가설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른바 표면에 새로운 살로 성형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회화가 캔버스의 표면에 물감을 칠해나가면서, 붓질을 통해서 모종의 형상을 만들어나간다면

이 작가의 경우는 그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보인다.

우선 작가는 앞서 언급했듯이 표면에 어느 정도 두툼한 양의 물감을 탄력적으로 칠해놓는다.

그것은 그리고자 하는 내용, 형태에 따른 면 분할의 결과이다.

쫀득하고 찰진 정도의 질감의 상태를 지닌 물감의 층이 촉각적으로 자리하도록 배치한 후에

그 위를 작고 예리한 금속성의 드라이버로 긁어 선을 새긴다.

추상적인 색면 덩어리가 배열되면

그 위로 속사의 선이 능란하게 인체의 윤곽을 포착하며 미끄러진다.

선이 무척이나 유동적이고 경쾌하다.

리드미컬하고 신속하며 대상의 형태감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선이다.

그 선은 특정 대상의 윤곽을 그린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른바 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 그러니까 물감의 층을 벗겨 내거나 깊이를 드러내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른바 네거티브적인 회화작업이다.

비어 버린 그 음의 공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종의 형상을 안겨주는 것이다.

작가는 원하는 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선이 자존 할 수 있는 물감의 두께, 깊이가 요구되었고

자유롭고 자신 있는 선들의 유영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물감으로 덮인 색면 바탕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칠해진 색면은 포괄적인 형태를 제공하기도 하고

동시에 구체적인 형상이 가능한 선을 표현하기 위해 불가피한 장소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동판화를 했던 작가의 이력, 경험이 고스란히 지금의 회화작업으로 밀려 나오고 있다는 인상이다. 




 붓을 대신해서 가늘고 강한 금속의 드라이버 도구가 물감 층을 벗겨내는,

밀어내는 작업은 다분히 조각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물감을 저부조로 깎아내는 일이고

화면을 촉각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그로 인해 회화와 조각, 판화의 다양한 기법이 공존하는 작업이고

손/붓을 떠난 회화이자

전적으로 선으로만 가능한 그림의 한 사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론적인 흥미보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이미지가 실은 본질적인 문제로 보인다.

예민한 선들이 춤추듯 흐느끼면서 안겨주는 이미지는

모두 젊은 남자들의 모습이고 대부분 혼자서 특정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대략 20대의 청년으로 보이는 이들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에 놓인 이들이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엄청난 압박에 시달리는 때이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지만 동시에 가장 게으른 나이이기도 하다.

배경은 과감하게 생략되고 인물들은 유사한 단색조의 계열로 이루어진

납작한 색면 바탕에 파묻히듯 놓여있다.

편안한 옷차림에 맨발로 누워있거나

최대한 휴식을 취하는 몸의 상태를 가시화한다.

그들은 일상의 거주공간에서 대부분 지극히 편안한 자세로 삶을 영위한다. 

호모 모빌리쿠스, 멜론을 듣다 잠들다, 초식남, 전동공구, 득템, 출사, 양푼라면,

덕후, 신상 카메라, 출국전야, 야식, 몰입, 쉼 등의 소제목을 달고 있는 그림들은 모두

집안에서 흔히 접하는 가족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보편적인 행동을 관찰한 것들이자

동시대 젊은 남자들의 행동양식, 풍속을 기록한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런 행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보편적인 동작이고

주어진 업무나 목적론적인 과제에서 벗어난 자발적인 휴식과 놀이

혹은 시간을 게으르게 소모하는 것에 속한다.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시스템 바깥에서 거의 유일하게 숨 쉬는 공간이고

그 영역 안에서 최대한 자신을 이완시키고 그 어떤 일, 성과, 목표, 경쟁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자기 보상적 차원에서의 휴식이기도 하다.

작가는 연민의 시선과 함께

그들이 일상의 공간에서 최대한 자유롭고 편안한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와 애정을 보내고자 하는 차원에서 

그와 같은 순간을 그리고 있어 보인다.

동시에 그 장면을 형상화하는 일 또한 가장 편안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그리는 일이기에

이는 작가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작가 역시 휴식이나 힐링과 맞물린 그림, 작업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고립되고 자폐적이다.

세상과 절연된 상태에서 오로지 휴대용 전화기와 연루되어 있다.

그들은 이 그림의 제목이 알려주듯 ‘호모 모빌리쿠스’ Homo mobilicus다.

휴대전화기의 대중화로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게 된 현대의 새로운 인간형들이자

타인, 세상과 무관한 채 기계와 접속되어 가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인간들이다.

무한경쟁의 사회 속에서 상처받는 이들은 자신의 고립된 공간 안에서 저 기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위안을 받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경제성장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개인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그로 인해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적대감도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힐링 담론이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힐링 담론은 ‘감정 착취’를 근간으로 새로운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른 결과물이기도 하다.

힐링 담론에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스스로 돕는다.’는 자조의 정신이고

따라서 힐링 담론은 노동자의 감정을 관리하기 위한 자기계발 담론의 일종(이택광)에 해당한다.

힐링을 한다는 순간, 치유와 휴식의 순간도

여전히 우리는 자본의 착취와 소비적인 경제활동에 저당 잡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휴식, 힐링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힐링과 휴식, 자유인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가는 “무엇을 그리는 것이 가장 재미있을까?”하고 자문한다.

과도하게 심각하고 난해하며 힘든 작업에 저항한다.

오늘날 현대미술이 지나친 개념주의로 피로하고 과도한 스펙터클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에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만큼은 편하고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 역시 그림 앞에서 그런 느낌을 공유하기를 원한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지극히 편안한 상태와 휴식의 순간을 안겨주고자 한다.

그래서 모든 속박과 목적의식과 경쟁과 압박에서 풀려난 느슨한 그림 속 육체들은

자신들의 몸을 죄다 이완시키고 더없이 자유롭게 늘어진 상태에서

현재의 시간을 마음껏 소진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젊은 세대들이야말로

그 순간을 즐기고 적극적으로 향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한국사회에서 그들은 모든 고민과 불안, 공포를 죄다 짊어진 불우한 세대가 되었다.

어쩌면 작가는 그들에게 그림을 통해서라도 잠시의 휴식을 안겨주고자 하는 것이다. 



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Homo Mobilicus









97.0 X 130.3cm

Oil on Canva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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